어느 날 어렸을 때 다녔던 주산학원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한 20여년 만인 것 같다.

거래처들과 뭐 얻어 먹을꺼 없나 전화하는 인간들 전화를 두 대의 핸드폰에서 열심히 골라 받던 중에 우연히 연결이 되었다.

간단한 안부인사…

20년 쯤 만의 통화 치고는 짧은 인사였지만 순식간에 과거로 돌아갔고 포근한 느낌이었다.

꼭 찾아뵐께요…

평소엔 겉으로 하는 인사 따윈 싫어해서 듣기도 싫어하는 말인데 전화주신 게 감사하니 저절로 먼저 나왔다.

다시 또 몇 일이 지나고 전화와 이메일에 휩쌓인 하루를 보내다가 또 짜증이 나서 갑자기 모든 업무를 제끼고 청주 내려가는 버스를 탔다. 사실 나는 한참 바쁠 때 가끔 이렇게 객기를 부릴 때가 종종 있다.

어렵게 수소문을 해서 현재 학원위치를 알아냈다.

사실 정확히는 어려운 건 아니었다. 세군데 정도 전화해서 알아냈으니까. 사회에서는 보통 이 정도 귀찮음을 "어렵다…" 라고 얘기한다.

학원에 위치한 건물은 30년일지 40년일지 모를 2층짜리 건물이었다. 당연히 법적으로도 철거대상일 것 같은 건물이었지만 새 건물을 올리자니 지방경제 사정이 있어서 좀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건물 내부는 열심히 구획을 나누어서 건물주가 나름 멋지게 학원상가로 만들어버렸다. 탁월한 선택과 타협이었다. 이 2층 짜리 건물에 없는 학원이 없다.

닳아서 맨질 맨질한 돌계단을 오르며 무의식 적으로 상가 주인의 수익을 짐작해본다. 나는 어딜 가던 여긴 얼마 벌까 생각뿐이다.

방음 안될 것 같은 나무판넬로 나뉜 빼곡한 학원들 사이로 이 학원인가 저 학원인가 슬쩍 슬쩍 살펴보는데 선생님하고 눈이 딱 마주쳤다. 알아 보지 못할 거란 생각은 택도 없었다.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선생님의 학원은 나름 상가 안에서 좋은 자리에 위치한 학원이었다.

근데 노란색으로 염색을 하셔서 움찔 했다. 선생님은 아직 40대 초반으로 보이신다. 다행이다.

"전화 안부 공격 받아서 왔구나?"

움찔한게 들켜서 당황하고 있는데 선생님의 첫 마디였다. "전화 안부 공격" 딱 맞는 말이다. 나도 하루에 몇 번씩 당하고 내가 필요한 사람에게 몇 번씩 시전 하는 기술이다. 속으로 다시 한번 사는게 참 거지 같다 라는 생각이 든다.

밖에서는 제법 상상하기 어려운 나름 넓은 공간이었다. 시간이 이른지 수업이 없는 날인지 학원 구석에 초등학생 2명이 방문판매로만 팔 것 같은 알 수 없는 잡지를 읽으며 놀고 있다. 새벗 이라는 잡지를 피아노 학원에서 처음 읽었나 여기서 처음 읽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나도 첫 인사를 던지기 위해 시계를 봤다. 11시 5분전

"아직 수업 전 이신가봐요… 11시에 수업 하시나요?"

선생님과 아이 2명이 앉을만한 작은 의자에 앉았다.

나는 5분간 그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삶을 살려고 하는지 주절 주절 늘어놓는다. 주절 주절 늘어놓는 입은 입이고 머리 속에서는 내 삶을 다시 리뷰 하면서 나도 참 더럽게 열심히 안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잘 살고 있어요… 라고 궁색하게 스피칭을 급하게 결론 내고 나니 잘 살고 있는 건 아까 처음에 얼굴만 잠깐 봐도 서로 알았겠구나… 부질 없이 5분을 날렸다는 생각에 잠깐 할말을 잃었다.

수업준비를 위해 일어나시는 선생님 표정엔 모든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가 가득하다.

급하게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 혼자서는 먹고 살만한데 사업을 계속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

궁색하게 변명으로 시작한 문장이었다. 질문 자체도 바보의 것이다. 머릿속으로 또 거지같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이 대답하셨다. 이제서야 나만 떠들었지 선생님 목소리는 오늘 두번째 듣는 것임을 깨달았다.

" 그 답은 너도 이미 알고 있잖니… "

뻔한 대답이 선생님도 머쓱하셨는지 정글고 교장선생님 처럼 홋홋홋 하고 웃으셨다. 그리고 20년 후에 다시 만날지도 모를 나를 뒤에 두고 놀다가라 기다려라 어쩌란 말도 없이 수업에 들어가신다.

이게 진짜 마지막이구나 라는 느낌이 든다. 운이 좋다면 한번 더 뵐 수도 있겠지…

나도 잠깐 의자에 기대어 오래된 가구와 책들을 살펴보다 건물 밖으로 나왔다.

무언가 끝낸 느낌에 크게 숨을 쉬어본다.

밖의 공기는 아까 만큼 답답하지 않았다.

 





2009/06/07 07:50 2009/06/07 07:50
Posted by 스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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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술potato 2009/06/08 00:35 PERMALINK M/D REPLY

    어려운 꿈인걸 ',.'

    • 스믈군 2009/06/08 16:12 PERMALINK M/D

      요즘에 이런꿈을 많이 꾼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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